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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포도 』
| 2015·07·23 13:18 | HIT : 551 | VOTE : 32


미국인 작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의 소설이다. 대공황기 미국의 사회상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농민의 삶을 묘사하면서 미국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함축하여 표현한다. 1939년에 출판되었고, 곧바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194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J.포드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소설을 대표작으로 하는 존 스타인벡은 196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1930년대 미국의 암울한 현실을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문체로 묘사한다. 오클라호마의 조드라는 한 농민 가족이 지주와 은행의 빚에 시달리다가 결국 삶의 터전을 버리고 비옥한 지역으로 소문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지만 거기서도 착취와 구조적 빈곤에 고통 받으며 비극을 당한다. 주인공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그들을 옥죄는 비인간적 상황들이 대조적으로 교차한다. 그런 내용을 통해 한편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휴머니즘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1930년대는 도시중심의 산업화가 가속되고 농업의 기계화로 대자본이 농촌의 삶을 지배하며 착취하는 가운데 경제공항이 몰아쳐 그 모순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클라호마주 일대에 심한 가뭄이 닥쳐오고 황사가 대기를 뒤덮는다. 경작지가 황폐화된다. 땅에서 작물을 수확하기 어렵게 된 농민들은 소득이 없어 은행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해 시달리며 온갖 빚을 끌어대지만 갚을 능력이 없다. 지주와 은행의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땅을 빼앗기고 만다. 농민들에게 은행은 의지할 금고가 아니라 이윤을 먹고 사는 괴물로 비춰진다. 생활 터전을 잃고 좌절하던 농민들에게 캘리포니아가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땅이 비옥하고 삶이 풍요롭다는 그곳에 가서 과일 따기 일을 하면 높은 임금을 준다는 광고문들이 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꿈을 품으며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결심을 한다.  

주인공인 조드 일가도 오클라호마의 농장을 잃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이들은 낡은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66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여정에서 역시 그들과 같은 사정으로 이주하는 다른 오클라호마 농민들을 만나게 된다.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많은 사람들을 '오키'라고 불렀는데 경멸하는 뜻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과거 오클라호마에서 겪은 불행과 앞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누리게 될 풍요로운 행복에 관해 서로 희망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주의 땅을 버리고 떠난 오키들은 무지개 피는 신세계를 상상하며 고단하지만 꿈에 부푼 여정을 계속한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길이었다. "백만 에이커를 가진 한 사람의 대지주를 위하여 10만 명이 굶주리는" 부조리의 현실에서 좌절하며 주저앉지 않으려고 새로운 희망을 쫓는 몸부림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환대한다는 황색 광고문은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열심히 일하면 아담한 새 집을 짓고 밭을 갈아 농사짓고 풍성히 추수하며 잘 익은 포도를 맛있게 실컷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주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도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따뜻하게 환영하지 않았다. 낙원은 없었다. 평범하지도 않았다. 또 다시 암울한 현실에 직면했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곳곳마다 밀려오는 이주민들로 들끓었다. 일감보다 사람의 수가 넘쳐났다.  한 사람의 손으로 충분한 짐 하나에 다섯 여섯 사람의 손이 뻗어왔고, 한 사람의 배에 찰 만한 음식에 다섯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굶주리다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들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대지주들은 가격 폭락을 우려하여 오렌지 더미에 석유를 뿌려 썩게 하고, 돼지를 죽인 뒤 생석회를 뿌려 못 먹게 만들었다. 가난한 오키들에게 오렌지와 포도와 돼지고기를 적선하는 지주들은 없었다.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오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탐욕, 착취, 저임금, 기아, 죽음이었다. 희망은 사라지고 분노의 포도만 주렁주렁 익어갔다. 자본가들의 농간에 시달리며 조드 가족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분노였다. 기아와 살육, 분노와 폭력, 파업과 투쟁, 좌절과 죽음으로 얼룩졌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또한 사별한다. 온갖 고난을 겪은 뒤 아들 톰은 파업에 가담하였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에서 많은 것을 깨달으며 각성된 어머니는 힘차게 살아 갈 것을 절규한다.

『분노의 포도』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서사 구조와 닮은꼴로 짜여졌다. 애굽(이집트)에서 박해받던 가난한 사람들은 출애굽의 이동을 거쳐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르지만 거기서도 원주민들에게 배척을 당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포도』에서 황무지와도 같은 척박한 오클라호마 땅을 떠난 사람들이 66번 국도를 따라 희망의 땅이라고 기대했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지만, 거기서 배척 당하며 가혹할 정도로 박해를 받는다.

그렇다면 진정 부조리와 불행으로 가득한 현실로부터 실존적 엑소더스의 길은 없는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존 스타인벡은 철저한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휴머니즘의 관점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민중의 조직화된 적극적 항거와 혁명적 전복이 아니라 조용하면서도 심층적인 분노와 소극적이지만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저항의 몸부림을 묘사하였다. 그래서 한 때 스타인벡은 감상적인 서사에 흘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분노'를 주제로 하면서도 그것의 문제의식과 해결 방법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문학에서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는 길은 도식적으로 정해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주제의 목적이 무엇이든 문학은 문학적 감동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분노의 포도』는 완벽한 기준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남더라도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님에 틀림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앞다투어 읽게 만들었고, 그들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떠서 분노하고 저항하며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하여 저항의 흐름에 의식적으로 동참하거나 지지하는 효과를 낳았던 것이다. 비록 폭발적인 파괴력은 없을 지라도 작품을 통해 솟아나는 조용한 분노가 당시의 조건에서 명분만 요란한 건조무미보다 나을 수 있었다.

스타인벡은 톰 조드 일가의 생존 드라마를 통해 세상의 모순을 생생하게 파헤치는 동시에 고난을 감당해 내는 생명력과 인간애를 서사시적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외형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사색과 성찰의 메시지도 심층적으로 담아냈다. 조드의 스승격인 짐 케이시가 설교하는 위대한 영혼의 사상, 그의 사도인 조드가 추구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위대한 인간애의 실현, 톰의 어머니의 영원한 모성상 등은 독자들에게 감동의 샘이 된다.  

조드는 케이시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성찰의 일면을 드러내 보인다. "한번은 그이가 광야에 자기의 영혼을 찾으러 뛰쳐나갔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단지 자기는 커다란 영혼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부도 다른 나머지의 모든 영혼과 함께 더불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광야 같은 곳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배고픈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싸우는 그런 곳에는 어디든지 가 있겠어요. 경찰 녀석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두들기는 그런 곳이라면 말예요. 케이시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분노에 못 이겨 미쳐 날뛰며 고함을 치는 그런 데에 나는 가있겠어요. 굶주린 어린 아이들이 저녁밥을 얻고서 웃고 있는 그런 데에 가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가꾼 음식을 먹고 자기들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런 곳으로 가겠어요."

분노 속에서 저항하고, 그 저항은 인간적 연대를 통해 실천된다. 그것은 여성 등장 인물들을 통해 더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묘사된다. 기아 속에 허덕이던 샤론이 사산(死産)하는 장면과, 그녀가 굶주린 노동자에게 자기의 젖을 물리는 장면이 그런 모든 것들을 함축하며 압권을 이룬다.

사내아이가 제 있던 구석으로 가더니 때가 더럽게 묻은 덧이불을 하나 들고 와서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응." 어머니가 말했다. "저쪽 사람은 왜 그러니?"
소년은 단조로운 목쉰 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고파서 그래요."
"뭐라고?"
"굶고 있어요. 목화밭에서 병이 들었는데 지금 엿새째나 아무 것도 못 먹고 있어요."
어머니가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한 오십 가량 되어 보였다. 털이 부숭부숭한 얼굴이 야위었고 멀겋게 떠 있는 눈이 아무 데나 멍청히 응시하고 있었다. ··· 어머니의 눈이 로자샤안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가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두 모녀는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로자샤안의 숨이 가빠지고 헐떡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겠어요."
어머니가 미소를 머금었다. "난 네가 그럴 줄 알았다. 알고 있었어!" 그녀는 무릎 위에 꼭 쥐어져 있는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로자샤안이 소곤거렸다. "다들 좀 나가 주실래요?" 비가 가볍게 지붕 위를 두드렸다. ··· 그러더니 그녀는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덧이불을 몸뚱이에 휘감았다. 그녀는 천천히 구석 쪽으로 걸어가서 쓰러져 있는 얼굴과 그의 멍청하게 뜬 놀란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에 누웠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로자샤안은 덧이불의 한쪽을 풀고 자기의 한쪽 젖가슴을 드러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그 남자의 머리를 끌어 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를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헛간 위쪽과 건너 쪽을 쳐다보았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굶주리며 혹사한 몸으로 태아를 사산하고만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한 없이 위로받아야 할 상황에서 여인은 더 처절한 상태의 타인을 위로하며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파격적인) 방법으로 인간적 연대의 표현을 실천한다.

스타인벡의『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웅장한 혁명의 함성이 뚜렷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꽤 밀도 있는 분노와 저항과 연대 그리고 인간애의 울림이 조용하면서도 또렷 또렷하게 전달된다. '분노'의 포도가 그 문학적 의미를 나름 성공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