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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1526~1761)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발전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후예 바부르(1483~1530)가 훗날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티무르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아대륙을 지배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이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 혹은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가 인도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17년 무렵이다. 그러나 바부르는 어릴 때부터 한때 그의 선조들의 땅이었던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야망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 1503년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파니파트 전투). 바부르는 이 승리를 발판으로 델리에서 아그라로 곧바로 진격,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역대 무굴 왕들의 칭호)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무더위에 지친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이때가 바부르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호소력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무굴에의 충성을 간절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와르의 라나 상가가 라지푸트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때도 그는 군사력에 있어서의 열세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 라지푸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종족분열과 무굴 기병대의 신속한 전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바부르는 파트나 근교의 고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을 패퇴시키고 비하르 지방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또한 벵골의 이슬람 술탄으로부터도 충성을 확인받았다. 이제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으로부터 바다흐샨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대제국 무굴의 초석을 닦은 동시에 그 시조가 되었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이 왕조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악바르는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간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현명하게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기보다는 결혼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굴제국의 쇠퇴

악바르 대제가 주변 세력들을 적절히 제어하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상 일종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페르시아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굴이 남인도를 제압하는데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굴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요소를 상당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자한기르(1605~27)·샤자한(1628~58)·아우랑제브(1658~1707) 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마라타인들은 매우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무굴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서서히 남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세력을 키운 마라타족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말와 지방을 점령했다. 이로써 마라타 세력은 인도대륙의 한 부족국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인도 대륙을 넘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듯 강성해진 마라타도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마주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이상의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파니파트 전투).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무굴 제국 등이 일종의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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