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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무너진다 』
| 2015·10·10 15:23 | HIT : 1,462 | VOTE : 73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의 소설이다. 1958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아체베가 태어나 성장한 아프리카의 삶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가운데 인간 개인과 사회가 직면하는 소외의 구조적 현실을 그려냈다. 소수와 다수, 약자와 강자, 주류와 비주류, 전통과 외세, 문화적 충돌, 제국주의 등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통해 음미된다.

아체베는 나이지리아의 '이보'족 혈통으로 태어났다. 그가 성장한 20세기 전반기 아프리카에는 토착민들의 삶에 전통과 서구화의 교차가 심층적인 갈등을 낳고 있었다. 아프리카 사회 전반과 종족의 삶에는 아직 전통이 저변에 남아 있었지만 그는 비교적 개화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대학까지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서구 문명과 문화에 친숙해졌다. 그런 배경을 통해 그는 양면적인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태생적인 토대로서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은 이보족의 삶을 통해 토착사회에 대한 깊은 인식을 지니는 동시에 외래 문화의 접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방송사에서 일하였고, 대학의 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는데 문학적 관심이 늘 떠나지 않았다. 아프리카 이보족을 소재로 글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이보족의 독립을 위한 '비아프라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인간과 세상에 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문학적 소양으로 삼았다. 아프리카 토착인들의 전통적 삶이 서구 문명의 침투 속에서 해체되고 몰락하는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문제의식이 치열한 편이었으나 실천을 위한 조건의 많은 제약 속에서 실제 자신의 삶은 타협적이었다. 비아프라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그는 고향을 떠나 서방 세계로 건너갔다. 록펠러 장학금과 유네스코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에 유학한 뒤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고,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며 전념하였다.

작가로서 치누아 아체베에게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한다. 하나는 태생적으로 물려받은 아프리카 이보족의 전통이다. 어린 시절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이보족의 신화와 풍속을 통해 토착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에서 전개된 민족주의 흐름을 체감하면서 아프리카적인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의  첫소설인 『모든 것은 무너진다』는 바로 그런 결과의 반영이자 형상화이다.

또 하나의 세계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교육받은 서구의 종교와 문화다. 그의 아버지는 일찌기 개방적으로 서구 문화를 접하며 수용하였고, 기독교 신앙과 전파에 힘썼다. 그 영향이 아체베에게 깊이 미쳤다. 그리고 그는 대학교까지 다니는 동안에 학교에서 서구적 요소가 적지 않게 가미된 교육을 받았다. 아체베는 서구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거부하지도 몰두하지도 않았다. 그는 서구적인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자기 종족의 전통을 이해하려 하였고, 서구 제국주의로 인해 야기된 비아프라 전쟁에 참여하여 독립 투쟁도 벌였다. 서구의 문명과 문화를 소화하면서 아프리카의 자존과 주체의식을 각성하는 의식의 나선이 융합적으로 진화하였다.

소설 『모든 것은 무너진다』는 이런 두 개의 세계가 교차하며 충돌하는 상황을 서사한다. 이보족이 모여 사는 움마피아 마을을 배경으로 오콩쿼라는 인물의 생애를 그리는 과정에서 그런 내용을 형상화한다.

이보족은 고유한 신을 섬긴다. 그 신은 전능하다. 그래서 삶 전체를 지배한다. 신탁에 따라 행동한다. 사람들의 생로병사가 모두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다.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이 삶의 덕목이다. 오콩쿼는 신에 힘 입으며 살아간다. 강인하고 부지런하다. 그는 게으름뱅이로 나약하게 살다가 죽은 아버지 웅오카처럼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마을 씨름 대회에서 가장 힘센 장사가 되었다. 전쟁터에서도 앞장서며 용맹을 보여주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가난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부지런히 밭을 일구고, 고구마 농사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의 계시를 충실하게 지키며 전통적 생활 방식을 엄격하게 지켰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풍습과 규율에 따라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섰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위엄을 지키며 엄격하게 대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으며 명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그런 오콩쿼는 이웃 마을에서 인질로 잡아온 소년 이케미푸나를 마을 대표들의 결정에 따라 자기 집에서 맡아 키웠다. 그 소년은 오콩쿼의 한 식구처럼 지내며 건강하게 자랐다. 오콩쿼는 그걸 흐뭇하게 생각하며 보람으로 느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이방인 소년을 더 이상 마을에 두지 말고 죽여야 한다는 신탁이 내려진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콩쿼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케미푸나를 산 속으로 끌고가서 살해하게 된다. 오콩쿼는 그 일로 깊은 시름에 빠진다. 신에 대해 처음으로 회의를 품게 된다. 이케미푸나를 친형처럼 따르던 오콩쿼의 아들 눠예가 처사에 반발하면서 아픔은 더 커진다. 그 뒤 살인에 앞장섰던 마을사람 가운데 에지우두가 죽는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오콩쿼의 총이 오발하여 에지우두의 아들이 죽는다. 오콩쿼는 신성한 땅에 피를 뿌리게 한 죄로 7년 동안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벌을 받는다. 이보족의 후예로서 그가 지켜온 명예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 마을로 간다. 그곳에서 식구들이 살아갈 집도 짓고 땅을 얻어 다시 농사를 시작하지만 추방당한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삶에 대한 의욕과 권위가 많이 흐트러졌다.

오콩쿼가 추방된 뒤 움마피아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백인들이 나타나고 인근에 교회가 생겼다. 마을에서 홀대받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백인들의 신을 찬양하며 섬기게 된다. 이케미푸나의 죽음으로 괴로워 하던 아들 눠예도 자기 곁을 떠나 기독교도가 되지만 가장의 권위에 손상을 입은 오콩쿼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콩쿼는 7년의 추방 생활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예전과 같지 않은 움마피아에서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는 깨지고 있었다. 전래의 신에 대한 경배가 희석되고 백인들에 대한 경계도 무뎌졌다. 백인들의 교회에 나가는 이단자들이 저주받지 않고 건재하는 것에 오히려 경외감을 느꼈다. 백인들의 과학적인 의료 기술이 자기네 무당의 주술보다 더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에 놀랐다. 게다가 백인들이 사가는 야자 기름의 가격이 올라서 돈을 버는 기회가 커지자 백인들에게 빌붙는 사람들도 생겨서 늘어났다. 집을 나간 오콩쿼의 아들 눠예는 기독교도가 된 뒤 백인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대학생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오콩쿼는 이러한 변화에 맞서며 이보족의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결심하며 나서지만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를 신뢰하며 따르지 않는다. 백인을 처단하고 교회를 불태울 때 마을 사람들은 승리의 환호보다 닥쳐올 위험을 걱정한다. 누구도 이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오콩쿼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가운데 많은 마을 사람들이 백인들에게 체포되자 이보족의 전통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자결해 버린다.

오콩쿼는 이보족의 전통을 지키려고 끝까지 분투하지만 그의 노력은 좌절되고 만다. 그는 토착 문화를 신봉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과 불명예를 극복하며 스스로 능력을 쌓아 명예를 얻었지만 새로 밀려오는 힘을 막아내지 못했다. 외부의 영향과 함께 공동체 내부에서 전통에 대한 회의와 포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외세의 침투에 의해 아프리카의 전통과 문화가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는 소외되는 사람들의 삶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실 문제와 상통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모든 것은 무너진다』는 아프리카 정신을 대변하는 동시에 인간 사회의 보편적 소외 문제에도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소외되는 인간의 비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프리카의 정신을 서사하면서 서구 언어인 영어로 작품이 씌여진 아이러니에서도 암시되듯이 분명한 한계를 보여준다. 다만 현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실감 있게 음미하며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한 점에서 그 문학성을 적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